단어장을 세 권 끝냈는데도 말이 안 나온다면, 공부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장 단위가 잘못된 겁니다.
원어민은 문장을 조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단어를 많이 알고, 문법으로 연결하면 문장이 된다고요. 레고 블록처럼요.
그런데 실제 언어 사용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에서는 원어민이 쓰는 표현의 상당 부분이 미리 만들어진 덩어리라고 봅니다. 매번 조립하는 게 아니라, 통째로 저장해둔 것을 꺼내 씁니다.
How's it going?, I was wondering if..., That makes sense, Let me know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문법적으로 분해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말할 때는 분해하지 않습니다.
왜 이게 결정적인가
속도 때문입니다.
우리 뇌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제한돼 있습니다. 문장을 만들 때 단어 하나하나를 다루면 그 용량이 금방 찹니다.
I / was / wondering / if / you / could / help / me — 여덟 덩어리입니다.
I was wondering if + you could help me — 두 덩어리입니다.
같은 문장인데 처리 부담이 네 배 차이 납니다. 그리고 남은 용량으로 다음 문장을 준비하거나, 상대 말을 듣거나, 표정을 살필 수 있습니다.
대화가 되려면 이 여유가 필요합니다.
조립식의 두 번째 문제: 어색함
문법적으로 맞는데 아무도 안 쓰는 문장이 있습니다.
"강한 비"를 영어로 하면 strong rain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heavy rain입니다. 문법 오류는 아닙니다. 그냥 영어 화자들이 그렇게 안 씁니다.
make a decision은 되지만 do a decision은 안 되고, take a shower는 되지만 make a shower는 안 됩니다. 규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굳어진 겁니다.
이런 건 문법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덩어리째 접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덩어리를 모아야 하나
무작정 문장을 외우라는 뜻은 아닙니다. 효율이 좋은 것부터 모으는 게 낫습니다.
빈칸이 있는 틀이 가장 값어치가 큽니다.
I'm thinking about ___ing— 무엇을 고민하든 쓸 수 있습니다Do you mind if I ___?— 무엇을 부탁하든 쓸 수 있습니다It depends on ___— 무엇에 달렸든 쓸 수 있습니다
하나를 익히면 문장 수십 개가 나옵니다. 완성된 문장 하나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남습니다.
동사와 명사의 짝도 중요합니다. have a meeting, take a break, catch a cold 같은 것들이요. 이걸 짝으로 외우면 아까 말한 어색함이 사라집니다.
대화의 기능 표현도 모아두면 좋습니다. 되묻기(Sorry, what was that?), 시간 벌기(Let me think for a second), 화제 바꾸기(By the way) — 대화를 굴러가게 하는 것들입니다.
덩어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법
읽어서 이해하는 것과 꺼내 쓸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소리로 익히기. 눈으로만 본 표현은 입에서 안 나옵니다. 소리 내서 여러 번 말해야 근육에 남습니다.
빈칸을 다르게 채워보기. I'm thinking about을 배웠으면 열 개쯤 만들어보세요. 그래야 틀로 자리 잡습니다.
시간을 두고 다시 꺼내기. 오늘 외우고 내일 다시 꺼내고, 사흘 뒤에 또 꺼내는 식으로요. 이건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단어장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휘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단어만으로는 문장이 안 만들어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단어는 재료고, 덩어리는 이미 조리된 음식입니다. 재료만 잔뜩 사놓고 요리를 못 하는 상태가 지금이라면, 필요한 건 재료를 더 사는 게 아닙니다.
Patto는 이 덩어리를 패턴 단위로 익히도록 만든 앱입니다. 빈칸이 있는 틀을 하나씩 익히고, 다양한 상황에 채워 넣으며 반복합니다.